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코르 와트 (문단 편집) == 역사 == 앙코르와트는 [[크메르 제국]]의 왕 [[수리야바르만 2세]]가 1122년부터 1150년까지 28년에 걸쳐 세웠다. 불교 성지로 알려진 지금과는 달리 사실 앙코르와트는 [[힌두교]] 사원인데, 당시 크메르 제국의 국교가 힌두교였기 때문이다. 수리야바르만 2세는 이만한 거대한 사원은 [[시바]] 신에게 봉헌하던 전통을 깨고 앙코르와트를 질서의 신 [[비슈누]]에게 바쳤다. 비록 수리야바르만 2세는 앙코르와트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앙코르와트가 완공되기 몇 년 전에 죽었다고 추정한다. 그래서 수리야바르만 2세가 죽은 이후에 만들어진 부조들여는 약간 대충대충 마감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앙코르와트는 완공된 이래로 국왕 직속의 핵심사원이자 크메르 제국의 가장 중요한 사원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완공되고 30년도 되지 않은 1177년, 크메르 제국은 인근의 [[참족]]에게 공격을 당해 치명타를 입었다. 이때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도 이때 참족에게 약탈당해서 크메르 제국은 나라가 휘청거려 망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나마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가 다시 제국을 회복하고 수도를 앙코르 톰으로 옮겨 천도하면서 크메르 제국은 [[기사회생]]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힌두교에서 [[불교]]로 바꿨는데, 그동안 힌두 신들을 그렇게 믿어왔는데도 나라가 망하기 직전까지 갔으니 힌두교 신앙심이 완전히 떨어져버렸던 것. 자야바르만 7세는 국교를 [[불교]]로 바꾸면서 앙코르와트에 있던 각종 힌두교 부조와 석상들도 상당수 [[불상]]으로 대체했다. 안타깝게도 중흥군주 자야바르만 7세 이후로 크메르 제국은 끝없이 쇠락했다. 인근의 [[태국]], [[베트남]] 등에 치이면서 고대의 영광은 온데간데없고 허구한 날 공격당하는 약소국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앙코르에 세운 각종 사원들과 건축물들도 모조리 잊혔고, 앙코르와트 역시 17세기 말 이래로는 거의 사람이 찾지 않는 폐허로 변해버렸다. 하지만 앙코르와트가 워낙 면적이 엄청난 건축물이라 아예 잊히진 않았고, [[일본]] 순례자들이 찾아와 작은 초막을 짓고 살기도 했다.[* 일본인 순례자들은 앙코르와트를 불경에서 [[석가모니]]가 오래 머울고 설법했다고 설명한 사찰 '기원정사'라고 생각했다. 이 곳에 살던 일본 순례자가 크메르 신년을 축하하는 의미로 남긴 비석도 남아 있다.] 이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가톨릭]] [[수도자]] 안토니오 다 마달레나도 1586년에 이 곳을 찾아와 방명록을 남겼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앙코르와트가 아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파일:754da2022a7dc1265308346a9b686d43.jpg]] 앙리 무오의 여행록 속 삽화. 물론 앙코르와트가 완전히 사람들에게 잊히진 않았어도 어디까지나 일부 호기심 많은 탐험가나 여행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정도였다. 동남아인들을 제외하면 세계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앙코르와트의 존재조차도 몰랐다. 이렇게 방치된 앙코르와트를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알린 사람이 그 유명한 앙리 무오(Henri Mouhot 1826-61)이다.[* 따라서 앙리 무오가 앙코르와트를 발견했다는 말은 틀렸다. 캄보디아인들은 앙코르와트란 장대한 건축물이 어디 있는지는 잘 알았다. 앙리 무오는 단지 앙코르와트를 서양에 처음 알렸을 따름이다. 우리로 따지면 어느 백인 탐험가가 1800년대에 [[조선]]을 여행한 뒤 '내가 [[석굴암]]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격이다.] [[프랑스]] 출신 박물학자 앙리 무오는 1860년에 캄보디아를 탐험하는 과정에서 앙코르와트를 방문했고, 그가 쓴 여행록이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앙코르와트는 마침내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다. 앙리 무오는 '이 신전의 아름다움은 [[솔로몬]]의 신전이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비견될 정도'라고 극찬하면서 앙코르와트를 유럽인들에게 소개했는데, 이 여행록이 이색적인 신세계에 관심이 많던 당대 유럽인들의 입맛에 딱 맞았기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는 얼마 지나지 않은 1863년 [[캄보디아]]를 보호령, 즉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사실상 식민지]]로 삼았다. 의도치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캄보디아의 영토가 넒어지기도 했는데, 유적에 관심이 많던 프랑스가 크메르 유적들을 모조리 손에 넣기 위해서 당시 태국령이던 씨엠립과 바탐방, 시소폰 일대를 침공해서 합병한 후 캄보디아령에 붙여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프랑스인]]들의 앙코르 유적 사랑은 계속돼서 1931년에는 앙코르와트의 모형을 [[파리(프랑스)|파리]] 만국박람회에 통째로 전시하기도 했고, 수많은 학자들이 앙코르와트를 방문해 연구와 발굴작업을 계속했다. 그동안 앙코르와트에 무성하던 초목과 나무들을 모두 뜯어내고 보존 처리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하지만 당연히 프랑스인들이 앙코르와트에 좋은 일만 한 건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선 [[동남아]]인들이 이렇게 위대한 건축물을 지었을 리 없다며 [[고대 로마]]의 후예들이 남겼다든지 심지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절에 [[마케도니아 왕국|마케도니아]] 병사들의 후예가 남아 만들었다든지 하는 별별 억지 주장이 다 나왔다. --알렉산드로스 의문의 힌두교도행-- 심지어 처음 이 유적을 발견한 앙리 무오도 캄보디아인들이 이런 유적을 만들었을 리 없다고 의심했을 정도. 그리고 프랑스는 여기 있는 문화재들을 상당수 약탈해 뜯어가 [[루브르 박물관]]에 두기도 했는데, 심지어 훗날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작가 [[앙드레 말로]]도 이곳의 문화재를 훔쳐간 전력이 있었는지라 이 사실이 그의 명성에 먹칠을 했다. ||[[파일:1_ctVhrGpH2wDGygJtvc9aVg.jpg|height=300]]||[[파일:Cambodia’s-years-of-Communist-terror-Khmer_Rouge_by_Angkor_Wat.webp|height=300]]|| ||1976년 앙코르와트 옆을 행군하는 크메르 루주. ||앙코르와트를 점거한 크메르 루주의 모습. || 캄보디아는 1953년 11월 9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하지만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캄보디아 내전]]의 발발, [[크메르 루주]]라는 최악의 살인집단의 득세 등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앙코르와트 역시 좋은 꼴은 못 봤다. 특히 문화재 보존 따위에는 관심이 없던 크메르 루주가 그나마 앙코르와트에 남아있던 목조 건축물들을 모조리 잘라 장작으로 썼고, 크메르 루주와 [[베트남군]] 사이에서 전투를 벌이느라 곳곳에 총탄이 박히는 등 앙코르와트는 이때 꽤나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게다가 앙코르와트는 오히려 전쟁이 끝난 80년대와 90년대에 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유물에 눈이 돌아간 태국인 도굴꾼들이 전후 캄보디아의 치안이 허술해진 틈을 타 앙코르와트에서 뜯어갈 수 있는 것들은 죄다 뜯어가버렸기 때문. 심지어 기껏 복원해놓은 부분까지 도둑에게 훔쳐졌다. [[199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전쟁]]과 약탈로 인해 중요 유물 30점 이상이 소실, 전체 유적지의 70%가 도저히 복구가 불가능한 상태로 파괴되었으며 사원 근처의 왕궁에 있는 유물 천여 점이 도난 및 파괴되는 등 유적지의 훼손이 매우 심각하다. 실제로 해자의 다리와 벽에 기관총으로 생긴 홈을 볼 수 있을 정도. 이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는 문화유산에 등재되기 전인 1982년에 유적지 복구를 위한 조사단을 파견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거대한 규모는 확실히 경이롭지만 천장을 떠받치는 구조가 그리 정교한 편은 아니라 자체적으로도 조금씩 내려앉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있다. 예를 들자면 [[아치]], [[볼트]], [[돔]]과 같은 천장 구조가 미흡한 편인 것. 아치를 만들고 싶었지만 도달하지는 못했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2000년대 들어서 캄보디아의 치안이 그럭저럭 안정화되고 난 이후, 앙코르와트가 사실상 캄보디아의 상징이기 때문에 조금씩 복구와 유지 작업에 시동을 거는 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